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20세기의 천재 화가 파블로 피카소, 게르니카

by kihoon.story 2023. 8. 26.

20세기의 천재 화가 파블로 피카소

20세기의 천재 화가 파블로 피카소

20세기의 천재 화가 파블로 피카소는 1881년 10월 25일 에스파냐 말라가에서 출생하였으며 피카소의 아버지는 미술교사였고 피카소는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초급학교에서 읽기와 쓰기를 어려워했던 피카소는 졸업이 어려울 정도로 학습능력이 저조했지만 그림을 그리는 데에는 누구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피카소가 14세 때 바르셀로나로 이주하였는데, 이때부터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미술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피카소는 학교의 규칙과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출석을 거의 하지 않아서 학교를 그만두게 되고 마드리드에 있는 왕립미술학교에 다녔지만 결과는 같았습니다.

피카소는 17세 무렵부터 프랑스와 북유럽의 미술운동에서 많은 자극을 받았으며. 특히 A. 르누아르, H. 툴루즈 로트레크, E. 뭉크 등의 화법에 빠져들어 이를 습득하기 위해서 노력하였습니다.

1900년 피카소는 19세에 처음으로 파리에 방문하였고, 다음 해 다시 방문하여 몽마르트르를 중심으로 자유로운 제작활동을 하고 있는 젊은 보헤미안의 무리에 합류하였습니다. 피카소는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 등 인상파들의 작품을 접하였고, 고갱의 원시주의, 고흐의 열정적 표현주의 등의 영향도 많이 받았습니다.

이때 당시 피카소는 프랑스어를 구사할 줄 몰랐고 파리의 화려한 이면에 가려진 빈곤과 비참함을 목격하고 질병과 성병이 가득한 도시의 가난을 두려워하였으며 피카소는 파리의 구석진 다락방에서 가난과 추위를 인내하며 지냈습니다.

하지만 피카소는 단기간에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20세에 첫 전시회를 열었고 그의 상황은 괜찮아지기 시작합니다. 피카소는 청색이 주조를 이루는 그림을 그렸는데 이때를 피카소의 '청색시대'라고 부릅니다.

청색시대에 제작된 작품들은 하층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의 생활과 고독감이 잘 나타나고 또한 파리에서 같이 지내던 절친한 친구였던 카를로스 카사헤마스가 스스로의 삶에 비극적인 선택을 함으로써 그의 충격은 더욱 커졌으며 1903년에 제작된 '인생'은 당시 혼란스러운 감정을 잘 표현한 작품으로 손꼽힙니다.

심적으로 혼란스럽고 슬픈 상황에 놓여있던 피카소는 1904년 몽마르트르에 지내면서 연애를 하기 시작하면서 그림의 색조가 청색에서 장밋빛으로 바뀌어가면서 색상이 밝아지기 시작했으며 '공 위에서 묘기를 부리는 소녀', '광대', '곡예사가족'등의 작품을 남깁니다.

그 후 1905년 피카소는 파리에서 인정받는 화가 되었습니다. 기욤 아폴리네르를 만났고 다음 해에는 H. 마티스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피카소의 작풍은 P. 세잔의 형태관을 살려나가면서 단순화되었고 1907년 피카소의 대표작인 '아비뇽의 처녀들'을 완성시켰고 피카소의 형태분석이 비로소 구체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무렵 피카소는 조르쥬 브라크와 알게 되었고 그와 함께 공동작업을 하여 입체주의 미술 양식을 창안하게 됩니다.

1934년 피카소는 에스파냐를 여행하면서 투우를 소재로 그림을 그렸으며 1936년 에스파냐 내란 당시 인민전선을 지지하고, 프랑코 장군에 대한 적의와 증오를 시와 판화로 나타낸 연작 '프랑코의 꿈과 허언' 및 

전쟁의 비극적인 모습과 잔학함을 예리한 시각과 독자적인 피카소 본인만의 스타일로 세기의 대벽화 '게르니카'를 완성하였으며 '통곡하는 여인'이라는 작품도 이 당시에 완성이 되어 이때부터 피카소 특유의 표현주의로 불리는 표현법이 나타나게 됩니다. 또 피카소는 6.25 전쟁을 주제로 한 '한국에서의 학살'과 '전쟁과 평화' 등의 대작을 제작하면서 현대미술의 거장다운 활약을 보여줬습니다.

 

게르니카

게르니카

에스파냐 내란을 주제로 전쟁의 비극성을 표현해 낸 피카소의 대표작 게르니카는 에스파냐의 소피아왕비 미술센터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세기의 대벽화라고도 불리는 게르니카의 게르니카는 에스파냐 바스크 지방의 작은 도시로, 1937년 에스파냐 내란 중 프랑코를 지원하는 독일의 무차별 폭격에 의하여 폐허가 되었습니다.

그 해에 파리 만국박람회의 에스파냐관 벽화제작의 의뢰를 받은 피카소는 이 소식에 접하자마자 한 달 반 만에 대벽화 게르니카를 완성하였습니다.

게르니카는 파리 만국박람회를 비롯하여 여러 나라에서 순회전을 가졌습니다. 에스파냐가 프랑코 체제가 되자, 피카소는 그림의 반입을 거부하였고 1939년 에스파냐의 민주주의와 자유의 회복 후 프라도에 전시할 것 등의 조건으로 이 작품을 뉴욕 근대미술관에 무기한 대여형식으로 빌려주게 됩니다. 이러한 피카소의 신념으로 인해서 1981년이 되어서야 에스파냐에 반환되어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이 되었다가, 보관상의 문제로 1992년 소피아왕비 미술센터로 옮겨졌습니다. 게르니카는 내전의 구체적인 참상이나 그 과정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정형적이지 않은 인물과 대상의 표현으로 그 분위기를 대신 자아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비극성과 상징성으로 채워진 복잡한 구성 가운데 전쟁의 무서움, 민중의 분노와 슬픔등을 격정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상처 입은 말, 버티고 선 소는 피카소가 즐겨 다루는 투우의 테마를 연상하게 하며, 검은색. 흰색. 황토색으로 압축한 단색화에 가까운 배색이 처절한 비극성을 높이고 있습니다. 극적인 구도와 흑백의 치밀하고 교묘한 대비효과등으로 인해서 

게르니카는 20세기의 기념비적 회화로 평가받음과 동시에 파블로 피카소의 대표작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피카소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피카소 너무 유명하고 훌륭한 화가지만.. 피카소의 그림들은 제가 이해하기가 조금.. 어렵네요..ㅎㅎ글을 작성해 보니 피카소도 고난과 아픔을 겪었었네요 고흐. 뭉크. 피카소까지.. 타고난 예술가들은 왜 이렇게 힘든 일들을 겪게 되는 걸까요 그저 그림을 사랑했을 뿐인 사람들인데 말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